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쇼다 사건 (문단 편집) == 해결 == '''그러나 이 사건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다만 이게 시일이 훌쩍 지난 오늘날의 국제관계 측면에서 봤을 때 거대 열강의 전면전으로 비화하지 않아서 해프닝이라고 치부되는 것이지 19세기 말에는 세계 1, 2위 열강간 군사적 충돌로 이어질 수 있는 현실적 위협이었다.] 결국 프랑스는 영국의 우세를 인정해 11월 3일 마르샹의 원정대에게 철수를 지시하면서 파쇼다 문제는 쉽게 해결되었으며 다음해인 [[1899년]] 3월에는 [[나일 강]]과 [[콩고 강]]의 수원 중간 지점을 경계로 하자는 내용에 양국이 동의했다. 프랑스의 횡단 정책이 상실된 데는 단기적인 원인과 장기적인 원인이 있었다. 단기적인 원인으로는 1898년 프랑스의 정치적 상황이 매우 혼란스러웠다는 점이 있다. [[파나마 운하]] 비리 사건과 [[드레퓌스 사건]]으로 대다수의 내각이 몇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단명했으며 이 때문에 4년간 재임했던 아노토 장관은 7월 말에 사임해야 했다. 뒤를 이은 [[앙리 브뤼송]](Henri Brisson) 내각의 [[테오필 델카세]](Théophile Delcassé) 장관[[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05d0065a|#]]은 [[독일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탈리아 왕국]]의 [[삼국동맹]]을 극히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과 불필요한 갈등을 빚는 것은 지극히 무익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애당초 당시 파쇼다에서 프랑스가 영국에 열세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프랑스군은 영국군을 만나 대립하게 되자 개전 여부를 상대편인 영국군에게 부탁해서(...) 영국군이 카이로로 전령을 보내 카이로에서 런던으로 가설되어 있던 해저전신을 통해 런던에 소식을 전한 뒤 런던에서 파리에 해당 소식을 전한 뒤(...) 파리로부터 다시 그 과정을 역으로 거쳐서 현지의 프랑스군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명령 전달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당연히 모든 정보를 알고 있던 영국은 이미 모든 준비를 갖추고 있었고 프랑스 본국으로써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장기적인 원인으로는 친영국 입장의 델카세가 이례적으로 7년 동안 장기 재임했으며[* 내각이 장수해서가 아니라 델카세의 능력이 뛰어나서였다. 총리의 변화에도 각료가 변하지 않는 이런 보수적인 프랑스 제3공화국의 특성이 장점으로 작용한 예다.] 프랑스가 횡단정책을 재개할 수 없는 환경이 더욱 공고해졌기 때문이었다. 프랑스가 노리던 에티오피아는 메넬리크 2세가 내륙으로 진출하려던 이탈리아를 격퇴[*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1895년]]~[[1896년]]. [[1893년]] 에티오피아의 조약 거부와 1895년 반란이 원인이 되었다. [[아도와 전투]]가 유명하다.]했던 상황이었다. 자신만만하던 메넬리크 2세는 [[1902년]] 철도 건설을 구실로 에티오피아에 손을 써 보려던 프랑스의 계획을 파악해 철도 건설을 중단해 버렸는데 이것이 결정타가 되었으며 1899년 초에 마흐디 신국은 영국에 의해 완전한 진압 단계에 있었다. 결국 프랑스 중앙정부 입장에서는 기존에 장악하려던 횡단선을 계속 추구할 이유가 점점 사라졌던 것이다. 또한 군사적인 측면에서 원정군을 파견할 수 있는 해군 함대가 프랑츠 측이 영국에 열세한 사실도 한 몫했다. 결국 [[1904년]] 영국-프랑스 협상[[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15a3798a|#]]([[영불협상]])에서 프랑스는 수단을 영국에게 확실하게 양보했고 대신 [[모로코]]를 보장받게 되었다. 이로서 영국과 프랑스는 각자 고립을 완벽하게 해소했다.[* 사실 영국은 당시에 고립(정확히는 불 - 독 대립에서의 중립)을 취해도 손해 볼 게 그다지 없는 입장이었는데 이것을 "명예로운 고립"이라고 한다. 반면 프랑스는 [[러시아 제국|러시아]]만으로는 동맹국이 충분하지 않았고 여기에서 적국을 더 늘린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결국 델카세는 지속적으로 영국과의 동맹을 추진했으며 이것이 친프랑스적인 [[에드워드 7세]]와 영국의 랜스다운 경에 의해 빛을 발했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의 이 협상은 [[러일전쟁]]으로 러시아가 확실하게 몰락하고 [[빌헬름 2세]]의 적극적인 팽창 정책과 건함 경쟁으로 독일의 위협 수위가 급격히 올라가게 되면서 [[삼국협상]]으로 이어졌으며 [[제1차 세계 대전]]의 발판이 되었다. 양면 포위의 위기에 빠진 [[독일 제국|독일]]은 2차례의 [[모로코 위기]]로 양국 사이를 갈라 놓으려고 시도했으나 도리어 이 시도는 영-불 협상을 강고하게 했다.] 이로서 수단은 '영국-이집트령 수단'[* 하지만 사실상 이집트도 영국의 보호령이었으므로 수단은 영국의 식민지였다고 봐도 된다.]으로서 영국의 식민지로 떨어졌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수단 민중이 대거 학살되었고 수단 측의 극렬한 저항과 같이 기독교에 대한 증오가 철저하게 뿌리내리면서 뒤에 종교적 갈등 요소를 남겼고 기독교를 믿는 [[남수단]]과의 갈등에 또 다른 원인이 되었다. 또 수단과 에티오피아의 역사가 극명하게 갈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 에티오피아의 역사가 극명히 갈린 데는 앞서 말했듯이 [[이탈리아 왕국]]이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를 두고 찝쩍거리다가 털린 것도 원인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